[해보니] ‘귤 토큰’으로 산 ‘제주 귤’…블록체인을 맛으로 체험하다

2019년엔 대중화를 이끄는 앱(디앱)이 나올 것이라던 당초 기대와 달리 올해도 블록체인, 암호화폐는 일상에 스며들지 못했다. 여러 블록체인 프로젝트와 서비스가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고지가 먼 초기 단계일 뿐이다. ‘2019년은 디앱의 해가 될 것’이라는 작년의 구호는 잊혀지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최근 기자가 손에 쥐었던 제주 조생 귤은 새해 블록체인 업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귤토큰을 통해 미리 귤을 주문하는 과정은 예상대로 복잡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 7월 3만 원으로 귤토큰 100개로 제주 귤 100개를 구매해 이번 달 택배로 받기까지의 체험을 정리했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여전히 블록체인은 불편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낯선 기술을 통해 손에 잡히는 과일을 먹는 경험은 투기가 아닌 혁신, 이전에는 생각해본 바 없는 가치에 대한 고민을 일깨웠다. 체험기를 통해 그 가치를 수요로 승화하기 위해 오늘도 화면 뒤 누군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귤토큰으로 산 귤 일부.

지난 14일 퇴근길, 집 앞 현관에는 10kg 상자 귤 한 박스가 놓여있었다. 제주도에서 온 올망졸망한 모양의 귤이 들어있었다. ‘귤이 물러터지기 전에 3인 가구가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귤토큰(ORG).’ 그 존재를 처음 접했던 건 올해 초다. 지난해 3월 이후 ‘스팀잇 인싸템’으로 귤토큰이 유명해진 뒤였다. 스팀잇은 스팀(STEEM)이라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블로그 형태의 소셜미디어로 2017년부터 주목받아왔다.

당시 식사 자리에서 업계 관계자는 ‘스팀엔진으로 귤토큰을 사보라’고 제안했다. 퇴근길에 스팀 엔진에 대해 검색했다. 스팀 블록체인에 기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맞춤형 자동화 계약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사이드체인이라는 설명이 눈에 띄었다. 쉽게 말해 ‘누구든 편하게 자기만의 토큰을 발행할 수 있는 플랫폼’이 스팀엔진의 취지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맞춤형 토큰은 스팀엔진을 통해 구매하거나 거래할 수도 있다. 귤토큰도 스팀엔진을 통해 태어난 여러 토큰 중 하나다. 

귤토큰을 포함해 여러 맞춤형 토큰이 스팀엔진에서 태어나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있다.

실제로 귤토큰을 산 시점은 추운 계절이 지난 무더운 여름이었다. ‘귤토큰의 수호자’로 불리는 박산솔 씨로부터 귤을 신청하는 링크를 받을 수 있었다. 박 씨는 제주도에서 전자책 독립 출판사 솔앤유를 운영하면서 귤을 판매한다. 기자는 토큰 크라우드펀딩을 위해 지난 7월 16일 계좌 이체가 아니라 스팀엔진을 통해 귤토큰을 사기로 결심했다. 

이 토큰을 사기 위해선 일단 그 근간이 되는 스팀을 구매해야 했다. 그달 16일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고팍스를 통해 스팀을 샀다. 당시 스팀 가격은 약 300원이었다. 약 3만 원으로 스팀을 100개 매수했다. 

고팍스에서 스팀을 구매하는 모습.

스팀을 스팀 지갑으로 옮기자 스팀엔진에서 귤토큰과 교환하는 절차가 남아있었다.

이 작업을 마무리한 시점은 같은 달 30일이었다. 그 과정은 길고도 지루했다. 그간 방치했던 스팀 계정에 다시 접속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기억해내야 했고, 스팀 지갑을 스팀엔진과 따로 연동해야 했다.

스팀을 코인거래소에서 지갑으로 옮기려고 시도할 때마다 해당 트랜잭션이 계속 실패했다. 똑같은 조건에서 결국 트랜잭션이 승인된 것으로 미뤄볼 때 네트워크에 이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스팀을 스팀페그(steem-peg)라는 형태의 토큰으로 변환해 스팀엔진에서 귤토큰을 구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귤토큰 샀습니다!”

기쁜 소식을 공유하자 박 씨는 “귤 판매 시즌에 @solnamu 스팀 계정으로 귤토큰 100개를 발송하면 귤을 구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물 상품인 귤을 구매할 때 토큰 발행자에게 토큰을 전송하면 해당 토큰이 소각되는 개념이다. 아직 자동 스토어 형태가 아니라 개인 간(P2P) 직거래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스팀페그 토큰 0.5개당 귤토큰 1개로 100개 ORG를 얻었다!

나무에 달려있던 파란 귤은 주황빛으로 무르익어 11월을 맞이했다. 다시 박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스팀엔진을 통해 귤토큰을 이체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잊고 있던 귤토큰을 사용할 기회였다. 나무가 무사히 열매 맺기 바라던 마음들이 귤토큰, 혹은 원화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귤을 받은 후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귤토큰의 사정을 더 들을 수 있었다. 

박 씨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리워드를 직접 주는 게 아니라 귤토큰을 드리고, 토큰 구매자가 이걸 거래하거나 나중에 실물 상품으로 교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며 “귤에 대한 리뷰를 스팀잇에 남기면 귤토큰을 추가로 받는 식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뷰 작성자가 자리를 떠나더라도 리뷰는 블록체인에 계속 남아있을 테니 귤에 대한 콘텐츠가 쌓이는 홍보 효과도 염두에 둔 짜임새다.   

다만 귤의 가치와 무관하게 스팀 가격이 하락할 경우 귤을 판매하는 입장에서 손해가 누적되는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자동으로 암호화폐 가격과 연동되는, 주문 및 입금을 일원화하는 웹서비스가 나오면 편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에 관한 솔루션이 오픈소스로 개발되다가 중단돼 현재 사용할 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귤토큰을 보낸 후 대문 사진처럼 귤 한 박스가 서울로 도착했다.

대화를 마친 후 귤 100개를 담은 상자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서비스 제공자든 이용자든 천신만고 끝에 얻은 결과물이었다. 그 길은 흙밭이었다. 스팀을 사는 것도, 스팀을 사서 귤토큰으로 바꾸는 것도, 이를 다시 귤로 교환하는 순간의 연속이 물 흐르듯 순탄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블록체인, 토큰을 통해 시간과 신뢰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귤토큰을 받는 이유를 묻자 박 씨는 “비트코인이 처음 나왔을 때 지인이 사보라고 권하며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며 “그 당시에는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이었지만, 시도하다가 복잡해서 그만뒀다”고 답했다. “이후 무언가 새로운 걸 접했을 때 설령 그 과정이 복잡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부딪혀보자고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100개의 귤을 회사 동료, 동네 주민들에게 나눴다. 이들은 ‘귤토큰은 잘 모르겠지만, 귤이 맛있으니 됐다’고 즐거워했다. “블록체인 서비스가 불편하다”는 평가는 흔하고, 너무 쉬운 말이었다.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는 시 구절처럼 블록체인도 사람의 마음을 덥힐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분명 올해 업계에도 그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이들이 적잖았다. 새해에는 본질에 다가가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그 여정은 귤토큰으로 귤을 사는 것만큼 녹록지 않겠으나, 세상의 일부를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터. 정직하게 도전하는 이들에게 박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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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출처 : 블록인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