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블록체인에서 기회 찾는 미국 IT 시장, 그 이유를 만나다 

[블록인프레스 김지윤 기자] 오해가 있었다. 미국, 특히 글로벌 IT 공룡들이 모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인공지능(AI) 같은 신기술 만큼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에 관심이 없을 것이란 편협한 발상이었다. 

2019년 6월 방문한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코인 투자 열풍을 지나 규제를 목도한 한국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대학부터 스타트업, 벤처캐피털과 IT 대기업도 블록체인에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지난 26일부터 이틀간 열린 ‘비트코인2019’에선 마이크로소프트 프로덕트 매니저가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현지 업계 관계자는 “여전히 블록체인이라는 단어에 엮이는 게 조심스러워서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면서도 “데이터, 인공지능 기술과 엮어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는 10년 전 처음 탄생했던 비트코인의 유산이기도 했다. 전자화폐, 이를 가능케 하는 분산형 시스템은 비트코인 백서로부터 탄력을 받았다. 페이스북이 지난 18일 자체 암호화폐 리브라(Libra) 백서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선 불가능했던 금융 거래를 ‘디지털 화폐’를 통해 인터넷 안에서 해결하겠다는 포부였다. 

비트코인으로 말미암아 독점적인 인터넷 환경이 재조명 받고, 이머징마켓이 재정의됐다는 뜻이다. 이머징마켓은 지리적으로 새로 자리매김한 인도, 중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비트코인은 이 말을 인터넷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기존 금융 인프라에 기댔던 구독 경제, 광고 시장 등이 이 기술을 통해 국경 없는 이머징마켓으로 부상한다는 전망이 나온다. 비트코인의 출현은 페이스북이 402에러라는 꿈을 꾸게 했다. 402에러는 실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인터넷 자체 결제가 필요하다(Payment required)”는 내용이다.

드라마 ‘실리콘밸리’ 시즌5 인트로 화면 우측 하단에는 미국 코인거래소 ‘코인베이스’가 보인다. (이미지 출처 : 드라마 ‘실리콘밸리’)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현장에서도 비트코인 커뮤니티와 블록체인 스타트업 사이에는 간극이 있어 보였다. 비트코인2019에서 비트코인 1만4000달러 돌파와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자찬하던 분위기는 “비트코인이 낡았다”는 현장의 목소리와 배치됐다.

이는 리브라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에서도 드러났다. 행사 현장에서는 “리브라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강력한 규제와 마주치게 될 것”이라며 탈중앙화한 형태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비트코인을 치켜세웠다. 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기존 블록체인에 대해 “큰 규모의 트래픽을 소화하기 어려운 디자인이고, 인프라로도 보완이 많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비트코인은 행사가 끝난 뒤 28일에 1만 달러로 급락하기도 했다.

암호화폐 공개(ICO) 붐이 사그라지면서 블록체인 스타트업의 활기가 줄어들었다는 오해는 이 지점에서 깨졌다.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같은 블록체인이 걸어온 길은 이들에게 밑거름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몸집이 커진 비트코인을 스타트업은 기회로 받아들였다. 

현장에서 만난 한 블록체인 스타트업 개발자는 “비트코인, 이더리움이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음에도 그 규모가 커지는 바람에 개선 속도가 빠르지 않다”며 “이들의 시행착오를 발판삼아 더 나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고 봤다. 실제 비트코인 관련 개발자는 “라이트닝 네트워크, 슈노 서명 등은 여러 이해관계자를 고려해 신중하게 적용된다”고 말했다. 새로운 플레이어는 거대해진 기존 블록체인에 맞서 뒤집기 한판을 노리는 듯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또 다른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관계자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과) 경쟁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도 표현했다. 비트코인 이후 이더리움이 ‘분산형 월드 컴퓨터’라는 야심을 꺼내든 것처럼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가 던진 메시지 자체를 소화한다는 의미다.

“페이스북을 삭제해라!”, “평화는 프라이버시를 사랑한다”. (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단적으로 90년대부터 반독점 이슈로 몸살을 앓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비트코인 행사장에 와서 “우리는 ‘어떤 기업’처럼 사람을 팔지 않는다”며 탈중앙화를 강조했다. 10주년을 맞이해 근본을 돌아보는 취지로 열린 컨퍼런스였다.

관련 기사 : “’어떤 기업’처럼 사람을 팔지 않는다” MS ‘비트코인 블록체인ID’의 포부

‘사람을 팔지 않는다.’ 행사장에 나온 이 말은 비트코인을 비롯한 블록체인 관련 기술이 추세를 앞서 읽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지난 24일 글로벌 IT매체 악시오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 마크 워렌 상원의원은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등 주요 플랫폼에 ‘고객이 제공한 데이터의 가치를 공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별도 법안을 통해 이 데이터를 고객이 다른 플랫폼에 옮길 수 있도록 조치하는 사안까지 고려한다고 언급했다. 

현지에서 만난 스타트업 개발자는 “(산학협력이 중요하게 손꼽힐 정도로) 더 나은 알고리즘이 등장하고, CPU 칩을 포함한 더 나은 하드웨어가 나오고 있다며 “규제도 데이터 주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따라온다”고 주장했다. 

IT 공룡으로 불리던 구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이 이달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Federal Trade Commission)로부터 반독점 위반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장에서 한 관계자는 “2017~2018년에는 아직 기술이 여물지 않았다는 판단 탓인지 미국 벤처캐피탈이 투자를 주저했다”며 “샌프란시스코는 이제 블록체인에 투자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여기서 일하면서 오가는 말만 따라가도 IT업계 첨단에 있는 자극을 받아요.” 유명한 IT기업부터 대학까지 아우르는 인적 네트워크를 엿볼 수 있는 소회였다.

단지 비트코인이 야기했던 ‘블록체인 버블’이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과 같이 흘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이 기회를 닷컴버블 이후 창발한 인터넷 부흥기로 만드려는 셈이다. 정반합 속에서 비트코인이 하나의 저항이 됐다면 규제, 하드웨어, 기술 연구, 사업 기회는 ‘분산경제(Deconomy)’라는 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샌프란시스코 AI스타트업 관계자는 “인공지능, 클라우드, 블록체인, 암호화폐를 연결해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기업들에 쓸만한 제품을 이미 제공한다”며 “오픈소스로 더 많은 개발자들을 불러들이고, 기업형 클라이언트에 더 다가가는 중”이라고 답했다. 

미래는 이미 와 있었고, 발소리는 발걸음을 늘 앞질렀다. 지구 반대편에는 게임 속 아이템이 금융상품이 되도록, 내 의료정보가 암호화해 의학 관련 인공지능 연구에 기여하도록 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채굴자, 지갑 업체, 코어 개발사 등 복잡한 생태계를 구축한 비트코인에서 출발한 이머징마켓들이다.

썸네일 출처 : 드라마 ‘실리콘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