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코노미] ‘자유 산증인’ 필 짐머만, “민주주의 위태롭다” 우려한 이유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흰 머리 노장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비쳤다. 5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분산경제포럼(디코노미·Deconomy) 연단에 선 필 짐머만 박사는 “과거 암호기술을 쓰지 못하게 하던 흐름에서 이젠 강력한 암호화 기술을 적용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짐머만 박사는 1990년대 이메일 보안 소프트웨어인 PGP를 개발하던 시절, 암호화 기술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짐머만 박사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1990년대에는 암호화 기술을 사용하면 ‘범죄를 저지르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이젠 규제 환경이 완전히 달라져서 미국 의무기록이든, 고객정보를 담은 회사 컴퓨터든 암호화를 적용하지 않으면 곤경에 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짐머만 박사가 1991년 PGP를 고안하자 미국 정부는 3년 가까이 그를 수사대상으로 지목했다. 당시 수출통제 방침에 따라 암호기술은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외국 반출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그는 “도리어 미국 정부의 이런 태도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PGP를 사용하는 기세가 더해졌다”며 “당시 조사를 받으며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도리어 그게 내 커리어가 됐다”고 회고했다. 수사가 종결된 후 그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출판부와 함께 PGP 가이드와 소프트웨어 코드를 담은 책을 수출했다. 책 수출을 막을 수 없었던 미국 정부는 결국 2000년대 들어 관련 규정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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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오늘날 암호화는 ‘탑재해야 하는 프라이버시 기술’로 자리잡았다. 짐머만 박사는 “최근 페이스북의 화상채팅 페이스타임에도 적용되는 양끝단 암호방식(end-to-end)을 호주 정부가 금지하는 조항을 마련한 바 있다”며 “동일한 기술을 활용하는 아이폰이 호주 시장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해보면 정부 조치가 얼마나 시대에 동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고 꼬집었다.

5일 오전 제2회 분산경제포럼에서 필 짐머만 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시대는 또 다른 국면으로 흘렀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감시체계가 복잡해진 현상황에 대해 짐머만은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경고했다. ‘소통의 민주화’를 강조해온 그는 “방벽 조치를 했더라도 그게 얼마나 버틸지는 시간을 가늠해야 한다”며 “감시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파시즘의 부상을 막는 게 더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한국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 오지 않았느냐”며 “프라이버시 불식은 다방면에서 그 형상과 조짐이 나타나는 만큼 기술적 대비뿐 아니라 입법 활동과 정치적 위력을 함께 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짐머만 박사는 “기계학습(머신러닝), 딥러닝 등과 함께 영상물이 접목되면서 사람을 감시하는 기술이 너무 빠른 속도로, 만연하게 개발돼 반대 의견 자체를 표하기 어렵다”며 중국을 예로 들었다. 중국의 경우 행인의 안면을 인식하는 시스템까지 개발해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여행 경비를 얼마나 쓰는지 등 모든 데이터를 융합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특히 인공지능 학습을 위해 막대한 규모의 데이터를 모으는 추세를 두고 그는 “너무 걱정돼 밤잠을 설친다”고 전했다.

또 감시기술이 무역로를 자유로이 오가며 민주주의에 다가가려던 국가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도 이어졌다. 짐머만 박사는 “중국을 기점으로 완벽한 감시 기술이 상품화돼 퍼진다”며 “수년 안에 자유민주주의가 붕괴할지 미리 염려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사는 가족을 두고 유럽에 거주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미국도 9.11테러 때 입은 피해보다 더 큰 규모의 침해와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미국으로 언제 돌아올지 질문을 받곤 하지만, 사정이 달라지는 걸 지켜보겠다고 답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20년 전 PGP를 개발했을 때보다 상황이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세계관이 더 분리되고, 이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권력이 움직이는 것을 걱정했다. 권력을 집중하기 위한 방향으로 감시기술이 발전하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이 양극화되고, 서로 증오하는 상황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더해 감시기술이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열쇠까지 활용하게 되면 “독재는 일상에 바로 들어선다”는 게 짐머만 박사의 전망이다.

그럼에도 역사를 비춰봤을 때 이런 방식의 파시즘은 영원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때 파시즘으로 인해 7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며 “이런 비극적 정황을 막기 위해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독립된 사법부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게 됐다”고 짚었다. 이어 “독재정권 지도자들에게 영원한 권력이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 환경을 앞둔 갈림길에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