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었다면 비트코인도 없었을 것”…필 짐머만 내한, 이유는?

20세기 미국 정부에 맞서 보안 이메일 시스템을 만들었던 필 짐머만(Phil Zimmermann)이 한국을 찾는다. 제2회 분산경제포럼(디코노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오는 4월 4~5일 양일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디코노미에 참석해 ‘기술과 프라이버시’라는 주제로 청중과 만날 예정이다.  

그는 21세기에 다시 ‘자유’를 논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주권이나 자율성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중앙화된 기업과 국가 권력 앞에서 분산화를 추구하는 블록체인의 철학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IT가 낳은 사회문제가 대두된 지금, 28년 전 그의 철학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 인권 위해 개발한 암호화 기술…미 정부에 맞서다

짐머만은 냉전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낸 개발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1991년에 PGP(Pretty Good Privacy)라는 암호화 기술을 개발했다. PGP는 이메일 내용 자체를 암호화해 당사자만 원문을 알 수 있게 하는 보안 시스템의 기반이 됐다.

그는 전 세계 인권운동가와 정치활동가를 위해 이 소프트웨어를 오픈소스로 퍼트리려 했다. 지난해 7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비트코인 수요일’ 행사에서 그는 “80년대 평화주의 운동가로 일했던 내게 PGP는 인권 프로젝트였다”며 “인권운동가와 정치활동가를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고안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 당시 암호화 기술은 군사 기술로 분류됐다. 미사일,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허가 없이 해외에 내보낼 수 없었다. 미국 정부가 각을 세우고 나섰지만, 짐머만은 PGP 개발과 보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여섯 차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끈질기게 완성한 코드였다.

짐머만은 PGP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군수 법(Army Export Control Act)을 우회할 방도를 고민했다. 해법은 ‘출판’에 있었다. 암호화 소프트웨어 코드를 반출할 순 없어도 종이에 인쇄해 출판한 책은 얼마든지 수출할 수 있었다.

결국 짐머만은 MIT 출판사와 함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PGP 사용 설명서와 PGP 코드만 담은 책을 출간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선 앞서 비슷한 판례에서 고배를 마셨던 경험이 있던 터라 PGP 보급을 막기 어려웠다.

그의 활동은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다. 현재 짐머만은 사일런트서클이라는 보안 통신회사를 설립해 고객의 통화 내역을 암호화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2014년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 사실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지지했고, 미국 통신사들이 정부와 지나치게 긴밀하게 협조하는 게 문제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 “소셜미디어 갈수록 우려된다”…자유 추구하는 ‘노장’

“갈수록 소셜미디어를 우려하게 된다.”

21세기 들어 짐머만은 냉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표현의 자유’를 입에 올렸다. 백발의 노장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 말 그대로 온갖 데이터가 소셜미디어에 축적되는 것을 경계했다. 디지털 흔적이 개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기술의 발전이 그 비용을 줄이고 있다는 맥락이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일상 대부분을 흡수한다. 어린이들은 영상이 아닌 ‘유튜브를 찍는다’고 말하고, 정치인은 페이스북에 성명을 올린다. 인스타그램이 프랑스 축구선수 마리오 발로텔리의 골 세레머니 무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의 은퇴 선언장이 됐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소셜미디어에서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짐머만은 이렇게 모여든 개인의 데이터가 기업이나 국가의 감시 하에 놓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소셜미디어의 수익모델은 사용자가 무엇이든 더 많이 클릭해 끌려들어가고 그로부터 격분(outrage)을 얻는 방식”이라며 “딥러닝이 이런 모델에 최적화한다면 사람들은 더 극한 감정에 내몰려 독재자에게 표를 던지는 솔루션을 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디지털 생활과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개개인에게 점수를 매겨 누가 전철을 탈 자격이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며 “모두가 제자리에 있는지 정부가 감시하는 디스토피아가 펼쳐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짐머만은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권력이 좌우하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지향해왔다. 고려대학교 사이버국방학과 김승주 교수는 “짐머만은 사이버 세상에서 인증 정보를 등록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인증기관이 빅브라더와 같은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1991년도에 내다봤다”며 “인증기관이 없는 상태에서도 인증서를 발급해 운영하는 시스템이 PGP에 이미 내장돼 있다”고 설명했다.

◆ “인증기관 분산화 최초 제시 인물”…그가 말하는 블록체인은

짐머만의 기술과 그에 담긴 철학은 암호화폐 및 블록체인과 맞닿아 있다. 모두 중앙기관의 인증 없이, 중개인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힘써온 그가 디코노미에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에 대해 어떤 혜안을 제시할지 눈길을 끄는 이유다.

짐머만이 개발한 PGP는 암호화폐 기술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암호화폐 지갑 소브린월렛의 윤석구 대표는 “PGP는 양자 간 거래(P2P) 암호화 기술이라서 암호화폐에 쓰인 ‘P2P 크립토커런시 페이먼트(결제)’ 기술의 원형을 제공했다”며 “짐머만이 없었다면 비트코인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은 시스템적으로도 짐머만의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김 교수는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도 그 안에 전자서명이나 인증서 개념을 쓰는 만큼 권력을 분산해야 하는 이슈가 발생한다”며 “데이비드 차움* 박사가 암호화폐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했다면 짐머만은 인증기관의 분산화를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 : 1990년 디지털 화폐 개발사 디지캐시(DigiCash)를 설립해 세계 최초의 암호화폐 ‘이캐시(Ecash)’를 출시한 ‘암호학의 아버지’. 2018년 제1회 디코노미에 연사로 참석했다.

제2회 디코노미에서 짐머만은 ‘기술과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강단에 선다. 또 ‘프라이버시 기술이 나아가야 할 점’을 두고 패널 토론에 참여할 예정이다. 소프트웨어 보안회사 펜타시큐리티 조아 에반젤리스트는 “인터넷, 위치추적장치(GPS), 전자레인지와 더불어 PGP는 군용 기술이 민간에 퍼져 세상을 바꾼 역사적인 기술”이라며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그가 한국에 와서 자유주의에 철학적, 기술적 바탕을 둔 블록체인을 언급한다니 당연히 주목할 만하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디코노미는 ‘블록체인 금융’과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두 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았다.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 <마스터링 비트코인(Mastering Bitcoin> 저자 안드레아스 안토노풀로스와 같은 블록체인 주요 인사뿐 아니라 뉴욕대 경영대학원 누리엘 루비니 교수, 국제통화기금(IMF) 싱가포르 책임인 조첸 슈밋만, 캐나다 중앙은행 수석연구원 프란시스코 리바데네이라, 코넬대 교수 에민 권 시러 등 글로벌 금융기관 관계자 및 학자들도 이 자리에 참석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심도 있는 기술 및 산업 전망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디코노미 티켓은 메인홀 행사와 기업 부스를 관람하는 ‘일반 티켓’(11만 원)과 기업 부스만 볼 수 있는 ‘부스 티켓'(1만1000원), 메인홀과 기업 부스를 관람하고 VIP 네트워킹 만찬과 공식 애프터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VIP 티켓'(112만 원)으로 구성된다. 티켓은 온오프믹스에서 ‘신청하기’ 버튼을 눌러 구입할 수 있다.

image : Phil Zimmer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