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출신 액셀러레이터 황성재 대표 “암호화폐 팔지 않은 이유는”

2018년 블록체인 시장은 지난해와 사뭇 다른 연말을 보내고 있다. 고공행진하던 암호화폐 가격은 맥없이 추락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등장한 다양한 암호화폐 공개(ICO) 프로젝트는 문을 닫거나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블록체인 확장성 이슈, 사용자경험 개선, 개인정보 침해 우려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다.

블록체인, 암호화폐 업계의 수많은 약속은 한여름 밤의 꿈이 되는 걸까. 속단하긴 이르다는 게 파운데이션엑스 황성재 대표의 의견이다. 파운데이션엑스는 국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퓨처플레이가 지난 4월 설립한 블록체인 전문 엑셀러레이터다. 이 회사는 신생기업에 투자해 가치를 키운 전력과 IT 기술을 비즈니스에 녹여낸 경험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황 대표 또한 카이스트에서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을 전공하고 300여 개 특허를 출원한 발명가로 유명하다.

잔칫집에서 초상집이 된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황 대표의 진단이 궁금해졌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블록체인 업계에 뛰어든 기관 투자자로서 파운데이션엑스가 그린 청사진은 무엇일까. 지난 13일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마루 180에서 황 대표와 마주 앉았다.

‘월드블록체인 서밋 마블스(World Blockchain Summit MARVELS)’ 패널 토의 중 발언하는 황 대표. (image : foundationX)

-블록체인 액셀러레이터로 뛰어든 후 사계절이 지났네요. 소회가 궁금합니다.

7~8개월이 흘렀는데 10년은 지난 기분이에요. 퓨처플레이에서 파트너로 일할 땐 병원 다닐 일이 적었는데, 이 업계에 들어선 이후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죠. 이제 막 시작한 회사였지만, 글로벌한 성격을 가진 시장이어서 과분하도록 많은 미팅과 IR, 연사 요청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업계에 비상식적인 일이 많다고 느끼는 해였어요. 사실 백서 몇 장으로 투자받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보통 좋은 창업가와 아이디어가 초기에 인정받아서 진성 투자자들이 붙고, 사업이 집적되는 과정을 지원하면서 나중에 수익을 나누는 프로세스이죠. 그런데 블록체인 시장에선 절차에 맞게 투자가 이뤄지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근본적인 문제죠. 무엇을 하는 프로젝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디서 투자받았는지 로고만 확인하고 투자하겠다고 진입하는 모습도 봤어요. 혹은 나만 뒤쳐지면 안 된다는, 소위 FOMO(Fear of Missing Out) 때문에 투자금을 넣는 경우도 적잖았고요.

처음 이 업계에 들어왔을 때 만난 사람들이 지금은 많이 빠져나갔어요. 한탕주의를 노리던 프로젝트가 ‘돈이 안 된다’ 싶으니 거품처럼 빠졌달까요. 덕분에 블록체인 생태계는 더 깨끗해졌다고 느낍니다.

이젠 전문성을 갖춘 새로운 조직이 진입하는 분위기예요. 안데르센 호로비츠(하단 영상)의 크립토펀드 자회사인 a16z crypto나 갤럭시 디지털(Galaxy Digital)같은 기관투자자의 진입이 대표적인 변화죠. 사업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가진 ‘좋은 자본’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반가워요.

-다이내믹한 1년이었네요. 내년도 블록체인 시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긍정적으로 봐요. 어떤 회사가 실제 가치를 내재해야 그로부터 시작하는 건데, 아직 그 지점까지 가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 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게 당연하고요. 스파게티를 먹어야 맛을 아는데 아직 스파게티 면도 삶지 않았어요. 실제 세계에 통용되는 것 없이 무언가를 평가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에요.

현시점에서 암호화폐 가격이 올라가는 건 대부분 시장을 조성하겠다고(마켓 메이킹) 가격을 펌핑한 것에 가까워요. 저희는 그렇게 해봤자 얼마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 제품을 사용자가 사용해서 생긴 내재 가치가 토큰 가격에 반영돼 가격이 올라갈 때, 그 이후에 최고점이 있기 때문에 지금 팔지 않겠다고 의사결정을 내렸어요.

스타트업계에서도 100개사 중 3개사만 성공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블록체인 산업에선 분명 더 어려울 거예요. 그럼에도 100개 중 2~3개의 유니콘이 나오면 나머지 손실을 금방 보전할 수 있다고 예상합니다. 갤럭시펀드의 노보그라츠가 올해 상반기에 수천억 단위 손해를 보고도 내년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황 대표는 “자금과 함께 좋은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투자처를 감시하는 게 투자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image ; foundationX)

-블록체인 산업이 제대로 자리잡고 도약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는 두 가지를 꼽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더 들어와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블록체인이 덜 언급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3G, 4G를 자연스레 여기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블록체인을 말하지 않을 때가 가장 많이 활용되는 타이밍일 것입니다. 아직 블록체인으로 누리는 게 없으니 이걸 내세웠고, 이 단어가 사라지는 시점이 더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파운데이션엑스가 출범했을 때부터 받은 질문이 있어요. “왜 플랫폼이 아닌 디앱에 투자하느냐.” 우리는 실생활에 응용되는 블록체인 서비스에 대한 고민을 극 초기부터 했어요.

-실생활에 응용된 블록체인 서비스에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을지 궁금합니다.

현재 블록체인 업계에서 실질적인 가치를 자체 생태계에 녹인 프로젝트는 찾기 어려워요. 그나마 스팀잇이나 비트코인을 거론할 수 있죠. 최근에는 시총 10위인 트론(Tron)이 P2P 파일 공유 서비스인 비트토렌트를 인수한 사례가 있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1억 명 가까이 쓰는 토렌트 입장에선 토큰을 활용해서 P2P 다운로드를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할 수 있어요.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상시로 켜둘 유인이 생기는 셈이죠. 콘텐츠를 내려받을 때 보상으로 받은 토큰을 다시 활용하는 구조도 가능하고요.

2019년에는 지금의 암호화폐 시장 순위가 다 변할 거라고 봅니다. 코인끼리 합쳐지고 누군가 없어지면서 실제 가치를 반영한 암호화폐가 부상할 거예요. 실제 암호화폐 지불회사 토큰페이가 라이트코인 재단과 손잡고 독일 주재 은행인 WEG Bank AG 지분의 9.9%를 인수했잖아요. 활력이 떨어지는 암호화폐들끼리 조합(association)을 만들어서 하나의 코인으로 탈바꿈하는 사례도 나옵니다.

실물경제도 똑같았어요. 2001년 닷컴버블이 꺼진 이후 애플 주식은 -97%, 아마존 주식은 -85%까지 떨어졌어요. 이들이 지금처럼 성장한 요인에는 ‘인수합병’이 있었어요. 버블붕괴 끝에 살아남은 조직이 활력을 잃은 곳의 인력, 기술, 노하우, 아이디어, 사용자를 흡수해서 하나의 유니콘으로 성장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018 벤처창업 페스티벌에 참석한 前 페이스북 마케팅 책임자 랜디 주커버그와 황성재 대표. (image : foundationX)

-탈중앙화 앱은 언제쯤 우리 손에 들어오는 서비스로 등장할까요.

저는 완전히 탈중앙화한 앱이 나오기까진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용자와 접점이 있는 곳은 중앙화한 앱이고, 기존 앱이 탈중앙화할 유인은 사용자에게도 앱 회사에도 없어요.

대신 필요에 따라 ‘탈중앙화 기술을 활용하는 앱(app utilizing decentralized technology behind)’이 등장할 겁니다. API*나 SDK(Software Development Kit) 형태로 앱의 한 기능에 탈중앙화 기술을 녹여내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소셜미디어 앱이 더 많은 유저를 유치하기 위해 블록체인 API를 끌어와서 토큰 관련 활동을 하게 됩니다.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 응용 프로그램에서 데이터를 주고받기 위한 방법(인터페이스). 기상청 API는 기상청에서 수집하는 정보를 사용자에게 쉽게 제공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격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블록체인 기술을 무엇이라고 바라보시나요? 앞으로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요?

블록체인은 도구에요.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HTML이라는 도구를 썼고, 스마트폰이 나올 때 통신 도구와 멀티터치 도구를 썼듯이 말이에요. 다만 이 도구가 아직 허접해요. 그렇다면 이 허접한 도구를 대하는 자세로 무엇이 필요할까요? 쓰레기통에 넣는다는 아니라고 봅니다.

블록체인 산업의 큰 문제점은 그간 너무 선험적(先驗的)이었다는 거예요. “고물로 멋진 도시를 만들 거야”라고 광범위하고, 과하게 백서만 만들어놓으면 도리어 고물이 고물로 전락하게 돼요. 안드로이드도 탁상공론에서 이론적으로만 말했다면 초기 버전의 허접함을 못 벗어나고 계속 별로였을 거에요. 두렵지만 실생활에 나와서 계속 혼나면서 개선됐기에 발전이 있었어요.

안드로이드 초기에 나왔던 시답잖은 앱들을 지금 안 쓴다고 해서 마냥 실패했다고 볼 수 없잖아요. 그 과정이 있기에 지금의 스마트폰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블록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을 뒤집는다’는 분위기에서 점점 차분해지는 상황이고, 실존하는 비즈니스와 이상이 조화하는 생태계가 조성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이미 퓨처플레이에서 투자한 80여 개 스타트업와 사물인터넷(IoT), 웨어러블, 인공지능, 무인자동차, 드론 등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활용할 여지가 있다고 봐요. 내년부터 각 영역이 유기적으로 뭉치고 서로 연결돼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이 결제 분야에서도 활발히 쓰일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조금 부정적이에요. 사용자 입장에서 신용카드 쓰는 것보다 별다른 이득이 없어요. 기업이 가져가는 이득도 실상 없고요. 기존 생태계보다 조금 더 개선하는 것은 혁신성이 없다고 봐요. 기존 산업이 못 했던 걸 해내야죠.

저는 대규모 페이먼트들이 블록체인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해요. 예컨대 1조2000억 원짜리 배를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 투자사가 서로를 못 믿으니 중앙은행이 에스크로*를 하고 중간에서 수수료를 받아요. 배가 완성되면 수수료를 나누는 에스크로죠. 이걸 스마트컨트랙트를 활용해 자동화하면 실적에 따라 수익을 나눌 수 있어요.

*에스크로(escrow) : 신뢰할 수 있는 제삼자가 중개해서 금전 또는 물품 거래를 하는 활동 및 서비스.

반대로 마이크로 페이먼트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실생활에서 0.00001원을 주고받을 일은 없잖아요. 디지털상에서 글을 쓰고 ‘좋아요’를 받았을 때 그에 대한 마이크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은 ‘디지털 머니’가 아니면 불가능해요. 반드시 1만 원이 넘어야 포인트를 쓸 수 있다는 식의 기존 시스템은 9999원 가진 사용자 입장에선 손해죠. 이런 경우 마이크로페이먼트가 적용되면 한 글자에도 가치가 부여되겠죠.

혹은 조건부 페이먼트를 스마트컨트랙트로 자동화하는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토익 학원에서 수업을 빠짐 없이 들었을 때 돈을 돌려주는 페이백 마케팅도 블록체인에서 편하게 자동화할 수 있겠죠. 기존에 현금이 하지 못 하는 일을 내년, 내후년에 블록체인상에서 목격하기 시작할 듯합니다.

-블록체인 액셀러레이터로 일하면서 잘한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싶나요.

파운데이션엑스를 시작할 때 굉장히 고민했어요. 암호화폐 시장에서 과실을 먹고 싶으면 법인구조보단 개인플레이를 하는 게 더 나았어요. 회사 형태로 참가한다면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더 고민되더라고요.

결과적으론 잘한 선택이었어요. 인터넷이 혁신됐을 땐 고등학생이었고, 모바일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땐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블록체인이 시류를 형성할 때 ‘더 늦으면 못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더 늦기 전에 도전해서 개인적으로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파운데이션엑스 패밀리데이 때 포트폴리오 회사와 찍은 사진. (image : foundationX)

내년 목표도 비슷해요. 실제 생활에 쓰이는 단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자는 것이죠. 제 아내도 제가 어디에 투자하는지 정확히 몰라요. 빗썸 혹은 비트코인을 알면 많이 아는 거죠. 여전히 대중화되지 않은 영역이에요. 그래서 단 하나의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라도 제대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만약 내년에도 제대로 된 게 안 나온다면 저를 포함해 이 업계가 혼나야지 싶어요.

그리고 이 업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 보자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암호화폐 전체 시가총액이 애플의 10%도 안 돼요. 걸음마 단계예요. 기존 산업 전반에 블록체인이 어떻게 미끄러져 들어갈지 고민할 시대라고 봅니다. 블록체인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고, 그 안에서 심취하는 건 맹점이라고 봐요.